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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교육과정: 개혁주의 교회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교회 ( 벧전 2:5, 9)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함에 있어서 장차 새 이스라엘인 교회가 여호와 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61:6) 고 합니다. 이 말은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신분( 身分) 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기능( 機能 ) 이 또한 어떠 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교회의 신분과 기능은 여호와의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제사장의 신분과 직무를 누리고 수행하는 교회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는 것도 중요한 주제인데, 베드로는 다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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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교육과정: 개혁주의 교회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교회 (벧전 2:5, 9)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함에 있어서 장차 새 이스라엘인 교회가  ‘여호와

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사 61:6)고 합니다. 이 말은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신분(身分)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기능(機能)이 또한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교회의 신분과 기능은 ‘여호와의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제사장의 신분과 직무를 누리고 수행하는 교회’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는 것도 중요한 주제인데, 베드로는 다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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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기술함으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

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5,9). 베드로가 기록한 이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여 제사장(祭司長)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고, 특정 계층으로서의 목사나 신부가 아닌, 교회원 전체 성도들을 가리켜 그렇게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제사장들이요’라고 했는데, 여기서 ‘제사장’이라는 아이디어는 구약시대 때 실존하였던 제사장이 배경이 되고 있는 사실은, 성경의 여러 부분이 가르치는 증거로 말미암아 명백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교회를 향하여 제사장이 되라고 한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제사장의 신분과 직무를 누리는 교회 인간(人間)과 신(神) 두 사이에 서서, 두 인격체간의 교제를 서로 연결시키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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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중보(仲保) 역할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따라서 이를 국가 차원에서 보아, 가령  ‘제사장 나라’라고 하게 되면, 이는 곧 다른 나라들을 신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고, 이들로 하여금 세상 국가들을 당신께로 인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국가를 운영해 나가는 것은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이 구속사 속에서 수행해야 했던 중요한 기능이었습니다. 이 중요한 기능을 수행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신 가운데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심으로 저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때 언약을 세우시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중요한 말씀을 하심으로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출 19:5-6). ① 여기서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스라

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옵서는 계속해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이 무엇이고, 이것을 온전히 수행하는 데서 누리게 될 축복과 영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제사장 제도’라고 거룩한 성례의 수단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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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실제 역사 속에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함으로 거룩한 소명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 불충실함으로 여호와의 소유로 존재하는 축복을 온전히 누

리지 못하였던 데서 초래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실패의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는 것이고, 은혜의 수단인 제사

장 제도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닌 까닭에,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제도는 원칙적으로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주어진 것이므로, 이 제도를 사려 깊게 연구함으로써 얻는 유익은 실로 크다 하겠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함으로 세상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케 하는 사역을 수행했을 때, 그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충성한 이 일을 가리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묘사하게 됩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

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제사장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구약적 계시관에 입각

한 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지금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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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제사장의 직무를 실질로 수행하는 경험을 누렸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실제로 알현(謁見)한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기꺼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한 바울의 이 사역은, 그에게 부여되었던 제사장적인 직무의 실제성에 입각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친히 알현한 것으로서의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의 이와 같은 놀라운 체험과 축복은, 이제 이 시대의 교회가 누리는 동일한 특권이 되었는데, 이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그의 몸인 교회를 품에 안고 하나님 앞에 알현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입각하여 신약성경은 성도들이 수행하여야 하는 제사장 직분에 대해

서 말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하려면 천상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제사장의 직무를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수행하심에 있어서 이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서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교회가 제사장의 신분을 누리고 동시에 그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시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동시에 천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고 계시는 제사장 직무의 한 부분은, 그의 몸인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이 지상에서 구현됩니다. 이때 교회는 이런 관계를 통하여 구현되고 있는 중요한 영적 실질에 들어가게 되는데, 곧 친히 하나님을 알현하게 된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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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이론이 아닌 실질의 영역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신분과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계신다고 하는 이 사실은 엄연히 실재하는 하나의 실질인 것이고, 이 놀라운 사실에 입각하여 교회의 성도들은 능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확증하여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와 같은 사실이 하나의 종교적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실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영적인 실제라는 말을 쓴 것은, 흔히 잘못 생각하듯이 어떤 추상적 관념이나 사상 혹은 사변이나 가상적 이론을 두루뭉실하게 용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통상 성도들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어떤 기독교적인 이론을 가리켜  ‘영적이다’라고 표현할 때, 사실에 있어서는 경험과는 상관없이 논리적 사고만으로 인식에 도달하는 것으로서의 사변(思辨)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만 정확히 말하여  ‘영적이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 이론이 종교적

인 특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이요, 동시에 그러한 이론으로 설명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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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 하나의 사변이 아니요, 실재(實在)적인 실제(實際)로서의 실질(實質)인 사실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 진리가 표방하고 있는 그 이론이 실제로  ‘그와 같은 실질을 갖고 있다’라는 차원에서  ‘영적이다’고 하는 표현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고 했을 때 사용한  ‘영적으로라야’의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 또한 구약적인 의미에서  ‘영혼으로 찬양한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도, 그야말로 전인격적인 찬양으로서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찬양한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지, 사변화시키기는 의미로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간 것으로서의 결과를 낸다고 하는 이런 이론을  ‘영적이다’라는 의미로 표현하게 될 때, 이는 그 설명이 실질(實質)로서의 실제(實際)적 실재(實在)인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확증해주는 결정적인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의 교회원들은 예배시에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시는 하늘 보좌에 실제로 들어간다고 선포하고 있는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입니다.

“너희에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을 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

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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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

린다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

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

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

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18-24). 여기서 비교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시내산 광경과 현재의 상태에 대한 것인데,

과거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실제로 알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려고 강림하실 때 시내산은 온통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불붙는 산, 흑운,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등등으로 묘사된 두려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18-19절). 이 광경이 얼마나 두려웠든지 모세까지도 두렵고 떨림으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21절). 백성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고로 더 이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아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19절). 시내산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현하게 되었을 때에 크게 두려워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타락한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을지라도, 아직은 예비적인 것일 뿐이요, 그들의 죄를 실제로 도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입니다(히  11:40). 따라서 백성들은 아직 자기들을 온전케 해주는 직무자를 의지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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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당시로서는 유일한 중보자였던 모세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 이들을 대신한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고, 이에 근거하

여 이스라엘에 제사장 제도를 도입하게 됩니다. 제사장 제도는 제사 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고, 이는 속죄, 대속, 구속, 칭의 등등의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예비적으로 구현함으로 성례전적인 효과가 있게 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예비적인 구원의 방식이 계시해주던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이고, 그리하여 구원의 근원이 되심으로 진정한 구원의 주가 되실 것입니다(히 5:8-9).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자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려 함에 있어서 친히 마련하신 하나님 자신의 구원방식이

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가 되는 것이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서려 하는 자는 반드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야 합니다(히 12:2). 그렇지만 시내산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성하시게 될 속죄 사역을 모형적으로 계시해주는 제사 제도에 관한 것들조차 이제 겨우 하나님께로부

터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친히 시내산에 현현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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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감히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큰 두려움과 떨림과 숨막히는 공포만이 엄습했습니다. 타락한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거룩히 구별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백성들을 압도하였습니다.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쳐죽임을 당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2절을 ‘그러나’로 시

작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여기서 ‘너희’가 가리키는 것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요, 곧 성도들입니다.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더 이상 무서운 시내산에 들어가 있지 아니합니다. 인자와 평화가 넘치는 포근한 도성 하늘 예루살렘에 실제로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 하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보좌요, 앞선 모든 믿음의 권속들이 들어와 있는 총회입니다(22-23절).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를 통하여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분, 곧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24절). 이 사실은 공교한 이론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사변이 아닌 것이고, 실질로서의 경험과 체험의 일인 것입니다.

‘영적이다’라는 표현을 이론으로만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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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살펴본 개략적인 사실은, 지금 21세기를 향해 전진해 나아가는 현대 교회가 이 시대의 역사 속에서 구속사와 접촉해 있는 실제적인 위치인 것입니다. 지금 ‘구속사와 접촉해 있다’고 하는 표현을 썼는데, 무슨 뜻으로 이런 표현을 썼느냐 하면, 교회가 누리는 이 영광이란 것이, 하나의 사변으로서의 이론의 영역이 아니요, 실제와 실질로서의 경험과 체험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녀와 부모와의 사이는, 서로가 비록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가족으로 형성되어 있는 아주 친밀한 관계가 해

소되지 않습니다. 동일한 원리가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서도 실존합니다. 성도들은 지금 비록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로는 항상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이것은 실질이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건대 현대 교회가 누리는 영광이 실로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이 사실이 보다 규범적으로 확증되어지는 것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때입니다. ①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대의 교회는 자기가 누리는 영광의 실체를 깨달음

에 있어서 매우 빈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이아몬드로 비교될 수 있는 자신의 값진 존재를 망각하고, 돌멩이와도 같은 천한 존재로 스스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실감 있게 그려볼 수 있는 실예가 하나 있습니다. 대한민국 백성이 미국에 건너가서 살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는 대한민국 백성입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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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미국에 오래 머물고, 그곳 문화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자신이 미국 국민인 듯이 생각되어지는 잠재의식적 영향을 받게 됩니

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느냐 하면, 이 사람의 일상사 속에 미국 문화가 자연스럽게 젖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으로 대하는 언론, 교통 수단 등등은 물론이요, 의식주 전반에 걸쳐서 미국 문화에 자연스럽게 젖어들게 되고, 이런 식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게 되면, 마치 자신이 미국인인 것처럼 느끼면서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근본적으로는 한국 사람입니다. 교회가 놓여져 있는 형편이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 하

나님의 나라에 속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지금은 세상이라고 하는 환경을 떠나 있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세상의 문화와 접촉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 그것을 창출해 나가기까지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이 이럴지라도, 또 이렇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인가에 대해서 항상 스스로를 일깨워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부지불식간에 교회로서의 신분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이라고 하는 누더기를 계속 걸치고 있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본래 신분이요 기능인 하나님 나라로서의 제사장적 기능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지지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회가 세상이라고 하는 누더기를 말끔히 벗어버리지 못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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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가운데 하나로, 그리고 이것이 사실상 결정적인 요소일 것인데, 성도들이 기독교 진리를 다루면서 통상 ‘영적이다’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야말로 하나의 추상적인 관념의 차원에서 취급하는 경향을 들 수 있습니다. 가령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하는 기독교 진리가 있다고 보면, ‘영적이다’라는 표현으로서 이 진리를 하나의 가상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이지, 실제의 경험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할 때에는 이는 실제로 이루어진 사실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인데, ‘영적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의 추상적인 종교적 이론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

다. 그러나 이 경우 ‘불변하는 진리요, 명백한 사실이다’라는 의미로 그렇게 ‘영적이다’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요,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② 또한 “죄를 사함 받았다”고 하는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있을 것 같으면, 이

내용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 사실(事實)로서의 실제가 됩니다. 따라서 복음에서 ‘죄사함 받음’의 의미는 죄책의 면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까닭에, 이제 죄를 이기고 극복하는 권세가 자기에게서 능히 발휘됨으로서 이 복음의 중요한 진리는 자신의 삶의 영역을 통하

여 확실하게 입증되는 증거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가 이 진리를 ‘영적이다’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사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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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이기는 증거를 실질로 맛보고 체험하는 경험을 누릴 수 없게 될 뿐더러, 이런 부족한 태도가 기타 다른 중요한 기독교 교리의 부분에까지 확대되면서, 결국 복음의 삶이란 것이 그야말로 기독교적인 종교 활동과도 같은 것으로 전락해 버리

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상태로 전락하게 되면, 남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

요, 스스로를 위해서도 매우 불행한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여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기쁨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는 요원해질 것이 당연하고, 나아가 이런 태도가 길게 이어지면서 억지로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가려 하게 되면, 형식과 내용이 분리된 외식에 빠져버리는 단계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게 되어, 최종적으로 스스로를 망치게 됩니다. 특별히 이 시대의 교회가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교리의 생활화’라는 말로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영적이다’라는 말을 합당하게 사용하고 또한 적용하는 일입니다. 성경 계시를 통하여 어떤 진리가 객관적으로 나타났을 때, 성도는 이 진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의 추상적인 사상이나 관념으로 전락하여, 공중에서 분해되어버리는 일이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실정인데, 이에 대한 각성의 가장 유효한 측면으로 먼저 ‘제사장으로서의 교회’ 개념을 바로잡는 일을 들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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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포착함 교회 혹은 제사장으로서의 성도 개념을 바로 잡는 일은, ‘은혜’의 의미를 바르

게 아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받은 바 은혜를 다시금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일을 위해서 교회는 우선적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대답은 의외로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가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 함에 있어서 수고해야 할 아무 짐도 지고 있지 아니합

니다. 아니 짐을 질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되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의 방식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선물(膳物)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롬 4:16)라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믿음의 방식, 곧 선물의 방식이 아니라면, 구원은 더 이상 은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선물의 의미요, 은혜와 동격이니, 곧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고,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롬 4:6)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의외로 이 부분에 있어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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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 어떤 성도가 자신의 지지부진한 신앙 상태를 벗어나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나

아가려 할 때에, 이때 무언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볼 수 있는 어떤 획기적인 봉사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마음이 심하다 보면, 때로는 40일간의 작정 기도 내지는 심하면 그에 상응하는 금식 기도 등등의 생각을 하게 됩니

다. 또는 분에 넘치는 헌금을 내고, 나아가 일정액의 돈을 차후에라도 반드시 바치겠다는 의미로 작정(作定)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부진했던 신앙 자세를 돈으로서 상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다시금 은혜를 받아내겠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을 하나님께옵서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더

라도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의 경배를 허락하신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계시의존 사색신앙이라는 데서 찾아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신 계시의 인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면 필연코 자의적 숭배에 빠져들기 마련이고, 이와 같은 인간의 자의적 숭배를 하나님은 용인하지 아니하십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자의적 숭배에 빠져들 때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꾸

중하시고 책망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따라서 은혜를 회복하려는 사람이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옵서는 이미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부여잡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실에 입각한 담대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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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단순히 심리적으로만 그런 기분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고, 복음적 진리를 실제의 삶으로 경험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의 경배만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새롭게 힘을 내려고 할 경우 가져야 할 중

요한 생각은, 이미 자기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답게 다시금 포착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방법 외에는 달리 유효적인 수단이 없는 법이고, 또 이 방법만이 사실상 진정한 의미에서의 봉사 영역,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흡족히 여기시고 족히 받으시는 변화에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

입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의 왕노릇 하는 권세에 순종하는 데서 되어지는 방식의 순종이 아니고는, 그 어떠한 수고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지 않는 것입니다.

택하심을 입음으로 되는 제사장 진정 그렇습니다. 교회는 새롭게 되려 함에 있어서 다른 어떠한 것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있는 은혜를 확실하게 포착하는 일에 힘써야 하고, 이것은 이미 받은 은혜인 까닭에, 마음껏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의미를 다시금 온전히 깨닫는 가운데 마음껏 사용하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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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미 받은 은혜를 마음껏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 보려할 때에 특별히 본 강론이 설정한 제목상 제사장이라고 하는 주제에 맞추어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① 제사장의 신분과 기능을 수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려 함에 있어서

첫째로 생각해 볼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진리입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가리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택하셨다’고 하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교리’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바로 그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신 까닭에 모든 일을 창세 전부터 작정하심으로 시작하시며, 만군의 여호와이신 능력으로 반드시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와 같이 교회를 제사장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아버지의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되어진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여기 ‘하나님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은 ‘택하심을 입은 자’와 연결됩니다. 하나

님께서 자기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셔서 구속의 효력에 참여시키시는 것은 언제나

‘택하신 사실’이 선행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택하심의 사상은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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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 개념과 동격인 것이고, 이는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됩니다(엡 1:3-6). 하나님께서 성도를 택하시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하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으셔서 그 머리의 사역에 참여케 하십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의 기능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구원의 기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둘째로 성도를 제사장 삼으시기 위하여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하게

하심’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기관의 관점에서 교회를 가리킬 때에 ‘거룩한 제사장’(5절), ‘거룩한 나라’(9절)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때 교회가 거룩한 제사장 혹은 거룩한 나라가 되는 것은,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사실’(1:2)에 근거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거룩하다는 개념은 도덕적인 용도로 쓰인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차원, 곧 관계성이 회복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지, 수양(修養)에 힘써서 어떤 도인(道人)의 경지에 이르게 된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택함을 입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셨으니,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로 연합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거룩함을 입었고, 따라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죄인의 신분으로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도리어 거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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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로서의 택하심을 입은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 교회는 어떻게 해서 거룩하게 되었습니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몸을 속죄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히 10:10). 성도는 이 효력에 참여함으로 동일한 거룩함에 이르렀고(히 10:14), 이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거룩하게 하신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한 사명을 수행하셨고, 그러기에 교회의 죄 값을 지고 대신 속제물이 되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유명한 대제사장의 기도 시에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17:19)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제사장이 됨 ② 이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나

타난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이 사실에 입각하여 교회가 수여 받게 되는 제사장의 신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신 사실에 입각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직분을 부여받는 몸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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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는 제사장 직무의 원천이 된다는 이론이 성립되게 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로 하여금 제사장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2:5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한 부분을 다시금 보겠습니다. 여기 ‘말미암아’라는 단어의 원문은 잘 알려져 있듯이 ‘디아( )’입니다. 이 단어는 개역성경에서 통상적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곧 ‘∼을 통하여’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어떤 사실에 근거하여 이처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기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신

십자가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교회를 구원하셨

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대제사장이신 당신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됨으로 말미암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수행하시는 세 가지 직무를 자연스럽게 계승하게 됩니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교회는 ‘제사장’이라고 하는 복된 직무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5:9-10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제사장으로 삼으신 사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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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계 5:10).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시되, 덧붙

여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게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이미 앞부분에서 교회를 제사장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다(계 1:6). 교회가 이 시대의 역사 속에서 천년 왕국의 권세를 누리는 것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이기 하지만, 또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도 그렇게 합니다(계 20:6). 왕적 권세와 제사장적 직무를 연합시키는 사도 요한의 이와 같은 관점은, 여기 베드로가 전개해 나가는 논리와 병행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제사장이요, 곧 왕같은 제사장이며, 그리스도로 더불어 함께 왕 노릇 하는 제사장입니다. 교회를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보아야 하는 이 중요한 관점에 한

가지 더 부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는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제사장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공통적으로 ‘나라’라고 하는 관점을 도입하고 있는 사실의 중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근본적으로 공동체(共同體)로서의 성격을 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제사장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때에 성도들 개개인에 의해서가 아니요, 성도들이 연합하고 상합하여 함께 공동체를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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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서 그렇게 합니다. 이것은 현대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주의적 신앙형태에 쐐기를 박는 확실한 성경적 명제입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성도의 위치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개개인 성도들이 각기 개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적인 성격을 띄어야 진정한 가치가 있게 됩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만인 제사장’의 원리를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우리 개혁파권

의 교회는 종교 개혁의 이 위대한 정신을 계승합니다. 목사를 가리켜 제사장이라 생각하고, 성도를 하나님께 데리고 나아가는 중보자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종교 개혁의 정통성을 벗어난 일부 교회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인이 다 제사장이다’라고 하는 것은, 중세기에 일어난 개혁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삼대 이슈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좀더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은, ‘만인 제사장’의 원리가 발효되는 것은 항상 ‘나라’라고 하는 관점에 속해 있을 때에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는 만인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을 누리려 함에 있어서 교회에 속하는 것을 통하여 공동체로 연합해 있어야 하는 전제를 떠나게 되면 불

가능하게 됩니다. 만인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이 발휘되는 것은, 공동체적인 성격을 띄어야 가능합니다. 일부 성도들 가운데는 “내 믿음은 내가 지킨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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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목사에게 나의 신앙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가운데, “종교 개혁기의 중요한 원리가 무엇이냐? 바로 만인 제사장주의가 아니었더냐?”고 하면서 신앙형태를 개인주의로 전개해 나가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대개의 경우 목회자에 대한 반발심리가 그 배후에 잠재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일부 목회자들이 자신의 직무에 대한 성격을 그릇 되이 이해한 중에 처신을 잘못

함으로 말미암아 야기한 상대적인 부작용인 것을 생각하면,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심히 미안한 심정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성도가 생각을 바르게 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

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란 것이 흔히 흑백논리에 익숙해 있어서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고 하는 식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만인 제사장의 원리를 주장함에 있어서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이해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경우에 있어서 만인 제사장의 원리는, 처음에 종교 개혁자들이 이것을 주장할 때에, 그것이 본래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에는 이르지 못하고, 단지 현실의 일부 그릇된 목회자들을 배척하고, 또한 다른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지 않고자 하는 생각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을 뿐인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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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 이제 마지막 주제로 교회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려 함에 있어서 그 구체적

인 모습들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교회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합니까? 이 질문의 의미는, ‘교회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에 답하여 말하기를,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제사장이 되게 하신 데에는 어떤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신분에 대한 이야기와 사명을 연결시킵니다. 교회가 누리게 된 이 신분으로부터 “과연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사명의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해답의 핵심은 ‘덕을 선전한다’는 데 있습니다. ① 여기서 ‘덕을 선전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것은 원

칙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의 수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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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리킵니다. 그러나 의미를 보다 구체화시키게 되면, 일차적으로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禮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최우선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구약 시대 때 드려진 각종 제사적 예배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런 원칙에 입각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5)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자기 백성 삼으신 일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로 말미암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제사는 ‘찬미의 제사’인 것이고,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동일한 뉘앙스로 베드로는 지금 ‘덕을 선전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베드로의 말은 이사야서 43:21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창조하신 목적은, 당신께 찬송을 부르게 하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금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서의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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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을 누리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아름다운 덕’입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서의 아름다운 덕’을 찬송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니, 곧 예배 행위인 것입니다. 이 예배 행위에는 ‘찬미의 제사’, 곧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가 수반됩니다. 이 입술의 열매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예배로서의 찬양을 가리키고, 다음으로 복음 전파로서의 선지자적 기능을 가리킵니다. 시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찬미하는 이스라엘의 찬송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찬양했고,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찬송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높이 기렸던 것이요, 이때 하나님께옵서는 크게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예배시에 찬송과 찬양을 드리는 것이 이런 원리를 계승하는 데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기에 찬송과 찬양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예배 행위가 됩니다. 찬송을 예배를 돕는 보조 수단 내지는, 설교를 돕기 위한 부속품과도 같이 생각하게 되면 안됩니다. 찬송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 행위인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의 가사 하나 하나에까지 얼마나 신경을 써서 선택해야 하는가의 중요성이 대두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칼빈은 종교 개혁기에 찬송가 가사를 선택함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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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지금과 같이 복음송 같은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천만부당한 일이었고, 오직 시편의 말씀만을 따나가 사용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나타난 것처럼, 이 덕을 선전하는 일을

교회가 선지자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세상에 선전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세상 속으로 들어오

신 목적을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이해하는 신학적 방법으로 ‘삼중적 직책’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왕, 선지자, 제사장 등의 세 가지 직무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법론입니다. 그리스도의 왕의 직무는 교회를 신령하게 통치하심으로 지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로 하여금 죄와 능히 싸워 이기게 하셔서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에로

이르게 하시는 사역을 일컫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선지자의 직무는 성도의 심령에 진리를 깨우쳐 주심으로 구속의 진리가 그의 속에서 효력이 있게끔 하

시는 것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무 수행은 특별히 화해(和解)와 중보(仲保)의 이중적 사역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삼중적 직책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활

동을 의미 있게 설명하는 요긴한 방식이 됩니다.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세상에 대하여 이 삼중적 직무를 수행하시는데, 곧 몸인 교회를 통하여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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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가리켜 ‘아름다운 덕’으로 묘사합니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덕(德)’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일컬음에 다름없을 것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완성하신 구속의 일이니, 교회는 이 일을 선전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제사장의 직무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복음 전파의 사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속의 일로서의 복음을 선전하는 일을 하게 되면, 그리하여 선지자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되면, 교회는 동시에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찬양 받으시게 될

것이기 때문인데, 이 과정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교회가 수행한 선지자적 기능이요 또한 제사장적 기능인 것입니다.

덕을 선전하는 방식 ② 그런데 이 덕을 선전하는 일은, 이론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지게 되면 효과를

내기가 어려울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는 사실상 제사장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신 일은 단순히 구속적 주제로서의 이론(理論)을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원 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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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법(秘法)과도 같은 방법(方法)을 가르쳐주심으로 교회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신 것이 아니고, 친히 구원의 근거가 되심으로 교회의 구속자가 되셨습니다. 여기에 개입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마디로 말하여 아가페적인 사랑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희생 사역인 것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로 하여금 맛보고 경험하게 하셨고, 교회를 제사장의 자리에 세워 사명을 수행하게 하심에 있어서 이 동일한 방식을 계승할 것을 원하십

니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특성은 사랑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모든 이론들은 삶의

영역에서 실제로 발생되어진 사건이라는 데서 그 특성이 찾아집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는 가르침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구속하는 대가로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실제적인 사건

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단순히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요, 사랑에 뒷받침된 하나님의 자기 희생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교회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여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려 할 때에 이 원리를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외치기만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사실을 세상으로 하여금 맛보고 체험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합당한 방식이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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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마만큼 효과도 크게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런 일에 생각을 크게 기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소리, 사람의 귓가에 들려지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이야기들은 도처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정작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하는 사랑의 행위는 지극히 희소하기만 합니다. 이 희소한 복음 전도 방식으로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운반해 나가야 하는 교회의 사명은 그리 넉넉하게 달성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

배제되게 되면, 교회는 사실상 제사장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제사장의 직무는 단순히 그 직무를 기능적으로 수행

하신 것으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친히 희생제물이 되셔서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으로 나타났고, 또 이 사실이 없고서는 제사장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신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이때 여기에 나타난 중요한 정신이 무엇이냐 할 때, 헌신, 희생, 자비, 사랑 등등의 개념입니다. 지금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제사장의 직무는 그 몸인 교회의 활동을 통하여 지금 여기 이 땅의 지상에서

계속되어집니다. 이런 연고로, 교회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여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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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에 있어서, 단순히 이론으로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그 활동을 극대히 나타내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려야 하고,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성도의 바른 모습인 것인데, 따라서 세상으로 하여금 사랑을 경험하고 체험하게끔 하는 일에 자신이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

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도 개별적으로 한다거나 해서는 안되고 다른 형제 자매들과 공동체적으로 연합하여서 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제사장의 직무 수행은 공동체적인 성격을 띄어야 합니다. 여기 베드로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나라’가 움직인 데서 되어지는 그런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성도에게 찾아오는 유익은 대단히 큽니다. 가장 중요한 유익은

그에게 신앙(信仰)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成立)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때 이 신앙의 성립은 구원 얻은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요,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속사와 실제로 접촉해 있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인 것이요, 그래서 죄의 권세를 벗어버린 분명한 성도인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증거가 있어서 틀림없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자녀는 마땅히 아버지를 닮기 마련이고, 이때 하나님은 사랑이신 까닭에, 자녀인 성도의 인격 또한 이 사랑을 풍성하게 발휘하는 데서 찾아집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을 이야기 할 때마다 이 사랑의 요소를 말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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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소망도 중요하지만 사랑은 더더욱 중요합니다(고전 13:13). 모든 기독교 덕목들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벧후 1:5-7). 이 사랑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운반해 나가는 실제적인 기관이 됩니다. 이 일에 권세 있게 참여할 수 있게 된 우리 성도들의 신분은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겠습니다.

경건의 본질은 사랑 ③ 여기서 복음의 특성이 사랑인 사실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가진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단연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기자는 경건의 본질은 자비, 헌신, 사랑 등등의 덕목들을 실행해 나가는 것에서 찾아진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6-27). 여기서 영어역 성경의 경우 경건(敬虔)이라는 단어를 종교(宗敎)라고 말로 번역

하였습니다. 참고로 종교(religion)라는 말은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라틴에서 나왔고, 영어 역에서 이 단어는 갈 1:13-14 약 1: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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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네 곳에서만 발견됩니다. 지금 야고보는 자비, 긍휼, 사랑 등등의 이미지를 경건, 곧 종교의 특성으로 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이 말을 주목해 보면,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기독교적인 신앙심의 특성이란, 자비, 긍휼, 사랑 등등의 덕성에서 찾아진다는 주장임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사랑으로 보고 있는 야고보의 이런 생각은 구약 성경에

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을 계승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신명기 24:18을 보면,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고 하신 말씀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사실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 것을 명령하시는 근거로 나타나고 있습니

다. 이런 기조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단순히 “네가 사랑을 입는 빚을 졌으니까, 너도 남을 사랑함으로 빚을 갚아라”고 하는 차원에서 이해될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저희를 속량하셨고, 계속해서

언약을 맺어주심으로 영원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종교라고 하는 실질이 성립되는 객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는 의미인 것

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에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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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기로 예정된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장자로 삼으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상속시켜 주시려고 출애굽시키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되었으니, 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실에서 찾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속사의 중요한 배경 하에서 야고보는 경건의 특성, 그러니까 신앙의 특

성을 자비와 긍휼과 사랑 등등의 행위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 안에서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기로 예정된

후사가 되었습니다(롬 8:17). 이 사실을 성립시키고 확인시키는 객관적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신앙인 것이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실질을 전개해 나가는 사실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날 우리는 야고보 기자가 말하고 있는 신앙의 특성, 종교의 특성에는 과연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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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 ④ 경건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교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이 사랑의 능력을 충

만하게 과시하게 될 때에 제사장의 직무를 권세 있게 수행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능력의 실질이 없이는 교회의 제사장직 수행은 외모와 가식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교회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려 할 때에, 일방적으로 자기의 심성에 좋다고

생각되어지는 대로 행동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는 제사가 됩니다. 항상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는 제사의 특성은 대개의 경우 이론으로만 전개되는 기독교적

종교 행위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성경은 이런 모순이 나타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열납되지 않는 일방적인 섬김의 행위를 자행하는 교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

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을 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신 것이요, 가인은 일방적인 제사를 드린 격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빌 4:18)라고 했을 때, 그 반대편에는 ‘받지 않으시는 불의한 제물’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섬김이어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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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고, 이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롬12:1)라고 한 의미와도 같이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의 봉사! 모든 지역 교회마다 반드시 있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봉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하게 드려질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시대가 악해져 가고, 병행하여 교회가 덩달아 오염되어져 갈수록 하나님의 관심은 더더욱 여기에로 집중되어집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실 때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부지런히 찾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23).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하나님께 인도함으로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수행했다고 말 할 때

에, 계속해서 이는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롬 15:16).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것’으로서의 제사장의 직무 수행이 절실히 요구되어지는 시대가 오늘날의 형편입니다.

결론: 제사장의 능력 회복 강론을 정리하고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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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이십니다. 이런 연고로 성도들의 교회 역시 제사장의 기능을 지니고 세상에 존재하게 됩니다. 새 이스라엘로서의 신약 교회는 옛 이스라엘이 수행하여야 했던 바로 그 제사장의 나라 사명을 계승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세상에 보여주고,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수행하는 제사장직은 교회 밖의 세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직무는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막 10:45), 섬기는 자로 우리 가운데 계셨습니다(눅 22:27). 이 섬김의 직무인 종의 사명을 대제사장의 직무 수행을 통해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경우처럼, 이 시대의 교회 역시 제사장의 직분을 수여 받은 가운데 종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첫째, 성도들에게 수여된 지위를 상기시켜 주니, 곧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 제사장이 되어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이 되신 가운데 구원의 근원이 되심으로 성도들을 그의

동료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어전에 당당치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가 성도를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게 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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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후사가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둘째, 성경이 교회를 가리켜 제사장이라고 칭할 때 이는 성도에게 맡겨진 사명

과 관련된 것으로, 성도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여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가리켜 베드로는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성도는 이 사명을 수행함으로 제사장의 직무를 행사합니다. 이때 말과 혀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천과 행위를 수반합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함에 있어서, 단지 들려주는 것으로만 그치지 아니하고, 실제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제 우리 개혁파 교회는 이상 살펴본 원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일에 크게 관

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