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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교육과정: 창세기 구속사 강해 12족장 야곱의 신앙 ( 28:10-36:43) 야곱의 서원 * 야곱이 벧엘의 경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자기 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까닭에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라고 고 합니다(16).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 ”(17) 라는 말은 야곱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특별한 성소가 아닌 곳에서도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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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교육과정: 창세기 구속사 강해 12강    

족장 야곱의 신앙 (창 28:10-36:43)

   야곱의 서원  *야곱이 벧엘의 경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까닭에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라고 고백합니다(16절).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17절)라는 말은 야곱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특별한 성소가 아닌 곳에서도 경험

 

 

하였던 데서 발산된 표현인데, 이 일은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반복되고 있습니다(마  18:20).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고백이 있는 바로 그 때에, 그리고 바로 그곳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 됩니다. 야곱의 경건과 고백을 주도하신 하나님의 이러한 계시는,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루살렘’과 ‘성전’이라는 계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 성립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후 하나님은 여기 벧엘의 후신으로서의 예루살렘 땅과 그 위에 세우도록 하시는 돌기둥의 상징으로서의 성전을 통하여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만남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 계시의 구조 속에서 하나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갇혀 계시지 않으며, 모형이 완성된 오늘날의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현대식  백화점과도  같은  호화찬란한  백화점과도 같은 교회 건물에는 더더욱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야곱은 여기서 베개로 삼았던 돌을 취하여 그 위에 기름을 붓고(18‐19절), 또한 

서원을 드리게 됩니다(20‐22절). 야곱이 돌을 세운 행위는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기념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신앙을 성립시키는 효과로 나타났습니다. 이 부분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오늘날 조건부로 서원을 드리는 잘못된 행위의 근거로 삼게 됩

 

 

니다. 야곱의 서원은 일종의 소원을 아뢰는 행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무엇을 얻고자 하는 어떤 조건을 걸고 이렇게 서원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곱의 서원에는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하는 심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서원은 이미 여호와께서 그에게 먼저 나타나셔서 그를 굳게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신 약속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행위였고, 이미 성립되어 있던 신앙의 한 양상이었습니다. 그는 이 서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하게 믿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서원은 맹세와 유사한 것이나, 이것이 하나님께만 드려진다는 점에서 맹

세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원은 구속력을 갖는 것이니만큼 누구나가 서원하고자 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시  15:4). 흔히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서라든가 부흥회와 같은 곳에서 일시적으로 고양된 감정으로 함부로 서원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바르지 못한 신앙 태도로 대단히 위험한 종교놀음입니다. 서원은 신중히 생각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 여기에 믿음과 의무감을 더해야 하며, 나아가 받은 은혜가 감사할 때에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원하고 바라던 바를 얻게 되었을 경우에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지라도 항상 하나님

 

 

께서 먼저 내신 계시의 통일성에 합당해야 하고, 그것의 한계를 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금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경솔하게 서원하였다면, 또는 신앙의 도리에 어긋나는 내용을 성급히 서원하였다면, 신속히 회개함으로 그 잘못된 서원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서원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합당한 것을 서원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밧단아람에서의 20년 생활(29:1-30:24)  야곱은 에서의 원한을 잠깐 피하기 위하여 밧단아람에 왔지만, 이곳에서 무려 

2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두 자매를 한 번에 취하게 되는 기이한 결혼과 함께 한 명의 딸을 포함한 열두 자녀를 낳게 됩니다. 나중에 귀로에 낳게 되는 베냐민을 포함하여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  12지파를 형성하게 됩니다. 야곱의 타향살이는, 의롭지 못한 외삼촌 라반의 간교한 손을 벗어나기로 결정함으로 비로소 마감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러나 무엇보다도 벧엘에서의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지시로 말미암아 야곱은 귀향길에 오르게 됩니다. 두 

 

 

관계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간교한 성품을 역이용하셔서 야곱의 귀환을 주관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견인하시는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나타난 구속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하란에 도착한 야곱은 한 우물가에서 우연히 만난 목자들에게서 외삼촌 

라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1‐5절). 그가 이렇게 쉽게 라반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야곱과 함께 하고 계셨던 데서 되어진 일입니다(28:15).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때마침 나타난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의 인도를 받은 야곱은 쉽게 외가에 이르게 됩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을 때, 라반은 야곱이 자신의 딸 라헬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쉽게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라반은 야곱을 이용하기 위한 일련의 제의를 하게 됩니다(15‐20절). 이 제의를 보게 되면, 라반이 상당히 불의한 사람인 사실이 나타납니다. 자비와 친절을 가장한 그의 제안은 실상 어떤 노동의 대가를 당연히 지불하겠다는 의미보다는, 대가를 줄터이니 일을 하라는 데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노동의 대가마저도 자신의 딸로 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라헬을 깊이 연애하고 있던 야곱이었

 

 

던지라 쉽게 칠년간의 노동을 수락하게 되었고, 라헬을 맞이하게 된다는 소망은 칠년간의 노동을 잠시간의 낙으로 여기게 하였습니다.  라헬을 얻기 위하여 칠년을 하루같이 일한 야곱의 인내와 뜨거운 사랑은 라반

의 파렴치한 술수 앞에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신혼 초야에 라반은 라헬 대신 레아를 들여보냄으로 야곱을 속인 것입니다(21‐24절). 이것이 야곱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교활한 속임수에 대한 보응이었을지도 모릅니다(욥  34:11 갈  6:7). 야곱이 강력히 항의하자(25절), 라반은 자기 지방에서는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풍습이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라헬을 위하여 다시 칠년간 노동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야곱은 이에 응함으로 우선 레아를 위하여 칠일을 채웠고, 이후 연이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26‐30절).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는 라반 가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은 타락한 인간들이 연출할 수밖에 없는 권모술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라반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조카를 속였고, 딸들을 보상물로  지급하는  파렴치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합법적으로  근친상간을 조성하였습니다. 둘째, 레아는 아버지 라반의 사기 행각에 협조하여 동생의 남편될 사람을 가로챘습니다. 셋째, 야곱은 오직 라헬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사랑하지도 아

 

 

니하는 레아와 육체만의 부부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야곱의 결혼 생활은 그 첫출발에서 불행의 조짐이 나타났듯이, 정상적으로 유

지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라헬만을 사랑했고, 레아와는 형식적인 부부생활만을 겨우 유지할 따름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여호와께서는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심으로 자녀들을 생산하게 하셨으나, 반대로 라헬은 무자하였습니다(31절). 레아가 네명의 자녀를 낳을 때까지 라헬은 한 명의 자녀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여전히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레아의 애타는 심정은, 그녀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특별한 의미로 지었던 이름들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 야곱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뜻이고, 시므온은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시고 이 아이도 주셨구나’이며, 레위는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이고,  유다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입니다(32‐35절).  그렇지만  레아가 이러한 고통을 받게 된 것은 사실상 자업자득이니, 곧 동생의 남편을 가로챈 데서 자초한 대가였던 것입니다.    

 

 

라헬은 언니 레아가 네명의 자녀를 낳을 동안 자신은 단 한명의 자녀도 낳지 못하게 되자 그 질투가 극에 달하여 야곱을 들볶게 됩니다. 야곱은 이로 인하여 짜증을 내게 되는데, 동시에 그는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고 있는 사실을 짐작하게 됩니다(30:1‐2). 마침내 라헬은 자신의 시녀인 빌하를 야곱에게 주는 것을 통하여 자녀를 얻으려고 시도합니다. 이후 빌하가 아들을 낳게 되자 각기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게 아들을 주셨다’는 뜻으로  ‘단’이라 이름을 짓고, 또한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는 뜻으로  ‘납달리’라는 이름을 짓게 됩니다(3‐8절). 그렇지만 라헬이 빌하를 통하여 낳은 아들들은 사실상 질투와 불신앙의 열매였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항상 문제의 해결을 자신의 생각에 의지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집니다. 라헬의 행동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불러왔으니, 왜냐하면 레아 역시 자신의 종 실바를 야곱에게 줌으로 반격을 가해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실바에게서  ‘복되도다’는 뜻의  ‘갓’과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는 뜻을 가진  ‘아셀’ 두 아들이 태어났고(9‐13절), 이로 말미암아 라헬의 꾀는 결국 레아에게 두 아들을 더해주는 결과만 초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아닌 것은 진정한 복이 되지 못합니다. 라헬이 비록 

 

 

빌하를 통하여 스스로 위로를 얻었으나, 이것이 그녀의 진정한 기쁨이 될 리 없습니다. 스스로의 위로에 만족을 얻지 못하던 라헬은 이번에는 다시 홥환채라는 특별한 약을 복용함으로 임신을 시도하게 됩니다. 라헬은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가져온 합환채를 얻는 대신 야곱을 레아에게 들여보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레아는 다시 두 아들과 한 딸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레아는 다섯번째 아들에게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는 뜻으로  ‘잇사갈’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또한 여섯번째 아들에게는  ‘스불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하여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는 소망을 가졌습니다(14‐21절). 그렇지만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입니다(시  127:3). 자식을 얻는 것은 남편을 재촉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며(1‐2절), 특별한 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14‐16절). 라헬은 자신이 시도한 방법들이 거듭해서 실패하는 것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아들을 낳게 됩니다. 비로소 라헬은 자신의 방법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일을 더 꼬이게만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에 따라 라헬은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하여 간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하나님의 들으심을 입어  ‘요셉’이라는 아들을 낳게 됩니다. 라헬은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기를 원하

 

 

노라’는 심정으로 첫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던 것입니다(22‐24절).    고향으로 귀환하는 야곱(30:25-31:55)  야곱이 처자를 이끌고 라반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제의한 것은, 

이후에 라반이 만류하게 되었을 때, 일련의 조건을 제시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산된 하나의 술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제안인즉은, 순백색의 양과 염소들 중에서 얼룩이가 나면 자기의 것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32‐33절). 라반이 이 제안을 쉽게 허락한 것은 이것이 너무도 어리석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순백색의 양이 얼룩무늬 있는 새끼를 낳는다는 것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지극히 드문 일인 것입니다. 물론 라반은 야곱이 얼룩무늬 있는 것들과 교배를 시키는 간계를 부릴 것을 내다봅니다. 따라서 자신의 라반은 얼룩무늬가 있는 양들은 자기 아들들 손에 맡겼고, 야곱의 양떼와는  3일길이 걸릴만큼의 거리에 떨어져 있게 하였습니다(34‐36절). 그렇지만 야곱의 간계는 다른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처음에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휜무늬를 내고, 이것을 양떼가 와서 물

 

 

을 마시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움으로, 얼룩무늬 있는 양떼들을 유인해 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이 소유한 순백색의 양떼들을 얼룩무늬 있는 양떼들과 교배케 하여 동일한 종자를 낳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방법이 되풀이 되는 사이 어느듯  6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급기야 야곱은 큰 양떼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37‐43절).    야곱의 소유가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자 급기야 라반의 아들들

이 의심을 하게 되었고, 라반이 야곱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31:1‐2). 바로 이러한 시점에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게 됩니다(3절). 지금 하나님은 일찍이 야곱이  20년 전에 고향을 떠나올 당시 벧엘에서 하셨던 약속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야곱은 즉시 부인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야곱은, 첫째, 그대들의 아버지가 자신의 품삯을 열번이나 변역하였으며, 둘째, 자신의 부요함은 하나님께서 라반의 불의를 징계하신 결과이며, 셋째, 그 하나님께서 이제 떠날 것을 명령하셨다고 설명했습니다(4‐13절). 야곱에게 불의로 일관하는 라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양떼들의 출생을 섭리하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10‐12절). 피조물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라반과 야곱의 각기 형편을 역전시키는 위대

 

 

한 능력으로 나타났으니, 실로 참새 한 마리의 생명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아비 라반의 불의를 인정하고 야곱의 뜻을 좇아 함께 가나안 땅으로 가겠다고 말합니다(14‐16절).  드디어 야곱은 고향을 떠나온지 만  20년만에 밧단아람을 떠나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라반의 눈을 피해 몰로 도망치는 것이었으니,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울리는 양심의 가책을 무시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 일행이 도주하듯이 라반을 떠나올 때 라헬은 몰래 드라빔을 취했습니다(17‐20절). 뒤늦게 소식을 들은 라반이 야곱을 추격합니다. 그러나 야곱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현몽하사 야곱을 해하지 말도록 지시하십니다(21‐24절). 따라서  3일째부터 추격을 시작하여  7일째에 라반은 야곱에게 이르렀지만, 그를 어찌하지 못하고, 다만 드라빔을 내어놓으라고만 요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25‐42절). 드라빔은 사람 모양을 한 수호신의 작은 형상인데, 아람 사람들은 이 신이 집을 지켜주고 번영을 가져다준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한 라헬이 이같은 미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것을 가져왔다는 것은 심히 유감입니다. 아직도 라헬의 신앙은 불신앙적이거나 혹은 다신론 사상인 것 같습니다. 드라빔을 핑계로 

 

 

어색한 관계를 매듭지은 야곱과 라반은 돌로 기둥을 세우고 피차 해치지 않기로 약조를 맺게 됩니다(43‐54절). 이때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관이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이삭의 경외하는 이’라고 표현한 것은,  20년 전에 그에게 베푼 이삭의 축복을 성취시켜 주신 ‘그’ 하나님을 의식한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반면 라반의 경우, 야곱이 호칭하는대로 단순히 그렇게 따라 했을 뿐이요, 야곱의 그 신관에 동일하게 이르러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상적으로 보기에 라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신관의 불일치 문제는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되어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바뀌는 야곱의 이름(32:1-33:17)  라반과 헤어진 야곱이 한 곳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천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이들을 볼 때에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렀고,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땅 이름을  ‘마하나님’이라고 지었습니다(1‐2절). 하나님께서 마하나임에서 당신의 군대를 야곱에게 보이신 것은 실로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과 동행하고 계시며 그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사실을 확증해주는 의

 

 

미 있는 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통하여 당신께서 야곱을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깨닫지 못합니다.    마하나임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자신의 것으로 확보하지 못한 야곱은 결

국 에서의 접근 소식을 듣게 되자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들게 됩니다(3‐8절). 에서가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에게 접근해오고 있었던 사실은(6절), 복수에 대한 에서의 무서운 집념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자신의 소유를 두 떼로 나누는 등의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지만, 엄습해 오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고, 결국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기도에 들어가게 됩니다(9‐12절). 인간은 위기 앞에서 처하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는데,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인 데서 나오는 본능입니다. 야곱은 특별히 약속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안에 나타난 언약의 하나님을 붙잡았으며, 그 언약을 아버지 이삭에게 이루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고, 또한 자신과의 언약을 이루시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여기서 신앙이란 말씀을 의지하는 데서 성립된다는 원리를 보게 됩니다. 야곱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 고백하고 있으며, 이것이 에서의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깨어질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야곱은 자신의 소유를 열 떼로 나누어 에서의 마음을 풀기 위한 예물로 앞서 보냅니다(13‐20절). 용서의 권한이 에서에게 있는 사건을 유발한 야곱의 두려움에 찬 모습은 일면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상대로부터 용서를 받기까지는 결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죄가 지닌 특성입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입힌 죄 때문에 무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서와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야곱은, 두 아내와 아들들까지 얍복강을 모두 건

넜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강을 건널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21‐23절). 이러한 상황에서 야곱은 한 힘 센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 매달리게 됩니다(24절).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여호와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생애에 새로운 전환점을 주시기 위하여 이렇게 이례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이 전환점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환도뼈의 위골이요(25‐26절), 그 의미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사

 

 

실에 있습니다(27‐28절). 그러니까 지금 환도뼈가 위골되는 아픔과 함께 이제까지의  야곱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의미는, “네가 하나님을 상대로 그처럼 힘이 세었으니 인간들을 상대로야 얼마나 더 승리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 이름을 주시기 위하여 지금 야곱을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는 이미 하나님의 작정에 속해 있었던 일이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세우신  언약  안에서  암시되었고,  예표되었으며,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때에 이미 예견되었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늘에 속한 자이며, 그의 후

손들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속하여 야곱이 누린 축복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야곱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 축복이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그래,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대답을 듣고 싶어합니다. 이 사실은 야곱이 이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이름지었던 데서 잘 나타나는데, 이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뜻을 가지기 때문입니다(29‐30절). 여기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라는 말씀의 의미는, 사실상  “그래 내가 여호와이다”라는 대답인 것입니다. 비록 야곱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스라엘로 선택되었지만, 야곱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여기  ‘브니엘’에서 결정적으로 이것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야곱이 가져다준 이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않게 됩니다(31‐32절). 그렇지만 이 사건은 야곱의 생애를 더더욱 구속자가 되게 한다는 데서 그 본의를 찾아야 합니다.    이제 야곱은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더 이상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뜻을 땅에다 구현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야곱이 다 수행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실 것입니다. 인간은 하늘의 소망에 직면할 때에 비로소 생기와 힘을 얻게 되어 참 생명의 자리에 속해지는 법입니다. 따라서 에서가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나타났을 때 두려움 없이 나아가 에서를 만났습니다(33:1‐11). 야곱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과는 달리 에서의 태도는 뜻밖에도 호의적이었습니다. 이는 야곱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장악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을 보호하실 당시 사울의 마음을 장악하신 그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서 선취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삼상  19:18‐24). 에서는 야곱

 

 

을 안내하겠다고 제의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다시 에서를 속임으로 따돌리고 숙곳이란 곳에 정착하게 됩니다(12‐17절). 이후 세겜 땅에 이른 야곱은 이곳에 상당한 기간 동안 머물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이 기간에 온갖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귀환을  주관하시면서 제시하신  목적지는 그가 출생한 곳, 

곧 가나안 땅이요, 그가 서원한 곳인 벧엘입니다(31:13). 그러나 야곱은 사실상 이곳까지의 귀향을 중단하고 세겜 땅에 아주 정착하고 맙니다. 당시 세겜 땅은 가나안 지경에 속하였지만, 야곱의 최종 목적지는 이삭이 있는 헤브론이나 브엘세바이어야 했고, 최소한 벧엘이어야 했습니다. 야곱은 이곳에서 토지를 매입하기까지 하는 등 장기적인 정착에 들어갔습니다(18‐19절). 처음에 야곱은 세겜 땅에 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칭합니다. 비록 야곱은 그  자신의  서원을 이행하기 위하여  벧엘로  올라가지는  아니하였으나,  이곳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신줄 알아 이를 감사히 여기는 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제 야곱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더 이상  ‘이삭의 경외하는 이’(31:42,53,  32:9)가 아니라, 야곱,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엘엘로헤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의미입니다. 이

 

 

제부터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지,  ‘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하나님을 잊고,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됩니다.    귀향을 중단한 야곱의 불행(34:1-31)  디나는 레아의 마지막 소생이자 야곱의 유일한 외동딸입니다. 디나를 향한 야

곱 가족의 사랑은 각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디나가 세겜 성의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불행을 겪게 됩니다(1‐2절). 그러나 세겜의 범죄는 평범한 개인 야곱의 집이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택함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대한 범죄였습니다(7절). 이후 세겜이 디나를 연모하여 정식으로 청혼을 해왔는데(3‐6,8‐12절), 야곱의 아들들은 이 기회를 살려 복수하기 위한 꾀를 내게 됩니다(13‐17절). 야곱의 아들들의 숨은 정략을 알리 없는 세겜과 그의 아비 하몰은 자기들의 성으로 돌아가 백성들을 설득하여 모두 할례를 받게 합니다(18‐24절). 할례를 받은  3일째 날은 고통이 가장 극심한 때인데, 야곱의 아들들은 이것을 기회로 쳐들어와 세겜 사람들을 잔인하게 도륙하였습니다(25‐29절).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이 노발대발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아들들의 거센 반발만을 받아야 했습니다(30‐31절). 

 

 

이 사건은 마치 라반의 이기적인 성품이 그 동생 리브가에게서 발견되었듯이, 야곱의 간교한 성격이 그의 아들들에게서도 나타났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야곱의 아들들의 죄는 다음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첫째, 기왕에 엎질러진 사건을 아름답게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의도적으로 저버렸으며, 둘째, 성례를 악용하여 보복을 위한 목적에 사용하였고, 셋째, 자신들이 뜻이 진실인양 위장하기 위하여 디나를 세겜에게 내어주었었으며, 넷째, 복수를 핑계로 약탈과 노략을 자행하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구속사의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디나

의 불행을 자초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인데, 이는 야곱이 귀향을 중단한 데서 찾아집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정착하였고, 이내 각종 우상숭배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이 입증됩니다. 처음에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올 때 시므온과 레위는 각기  12세와  11세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밧단아람에  20년간 머물렀지만, 제  8년째 되던 해부터 르우벤을 시작으로 하는 아들들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레아의 모태로부터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등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올 당시 시므온과 레위는 각기  12세와  11세 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므온과 레위

 

 

가 칼을 차고 나가서 세겜 성의 기라성 같은 장정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면, 적어도 이들의 나이가  20세 이상은 충분히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야곱은 여기 세겜 땅에서  10여년 머물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일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벧엘까지의 여행을 마쳤더라면, 디나가 슬픔을 겪거나 이로 말미암은 과도한 살륙이 자행되는 불행한 사태는 발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가족이 겪은 불행은 하나님의 귀향 지시를 불순종한 데서 초래된 사건인 것입니다. 참된 순종은 결과까지 나아갔을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지, 이렇게 중도에 멈추게 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다음으로 야곱이 우상숭배에 빠진 사실은, 그가 이후 이곳을 떠나게 될 때에, 온갖 우상숭배용 기구들을 땅에 묻었던 사실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35:1‐5).  견인까지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원(35:1-36:43)  선택하시는 은혜에 입각하여 구원을 누리게 되는 성도들이 얻는 위로는, 하나

님은 한 번 시작하신 구원 역사를 결코 중도에 포기치 아니하신다는 사실에서 오는 바, 구원의 영원성으로부터 찾아집니다. 이 사실은 한 차례의 불행한 격동이 휘

 

 

몰아친 후 다시금 벧엘로의 귀환을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에게 임한 데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35:1).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구원을 확정적으로 선포하신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지만 이 일은 그의 출생 이후에 비로소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비록 표면

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이미 그의 어미 리브가의 모태에 있을 때부터 되어진 일인 것이며, 더 나아가 그가 잉태되기 이전인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구속사의 자리에 서 있는 야곱은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인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되돌아와야 하니, 이 큰 축복을 온전히 야곱에게 제공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야곱을 견인하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바로 여기에 창세기  35:1 말씀이 갖는 특별한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당신의 백성을 한번 택하신 한에는, 끝까지 이를 완성시키신다는 사실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시  138:8 빌  1:6). 바로 여기 야곱에게 나타난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계시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위로를 위한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을 잊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야곱을 

기억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떠난 사실은, 그가 자기 집에 있는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금하지 않았던 사실에서 잘 나타납니다. 어쩌면 그 역시도 이 일에 결정적으로 가담했을 것입니다. 급기야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 야곱은 식구들을 재촉하여 그동안 자행했던 온갖 우상물들을 거두어 땅 속에 묻어버립니다. 큰 일을 저지른 야곱 일행이 세겜을 도망치듯이 떠나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면 고을들을 큰 두려움에 빠트리사 야곱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2‐5절).    야곱은 드디어 벧엘에 이르렀습니다. 세겜에서 벧엘까지의 거리는 약  45  km의 

거리 밖에 나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 짧은 거리를 통과하기까지 무려  10여년의 세월을 흘러보냈습니다. 벧엘에 도착한 야곱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쌓고  ‘엘 벧엘’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6‐7절). 이곳에서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사망하게 되는데(8절). 그녀는  30여년 전에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인도했을 때부터 줄곧 

 

 

야곱과 함께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올라온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게 됩니다(9‐15절). 

복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됩니다. 야곱은 일찍이  10여년  전에  얍복강에서  이  이름으로  불리울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33:28). 그러나 야곱 자신은 이러한 개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그 의미를 알게 되었으니, 바로 그의 구원, 즉 그를 여기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또한 이곳에서의 복된 생활이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10절). 둘째, 많은 국민과 왕이 이스라엘의 허리에서 나오게 됩니다. 야곱에게 보장된 구원의 축복은 그의 후손들에게로 연결됩니다(11절). 이 예언은 다윗의 왕권과 그 나라의 백성들이 형성될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다윗이 왕권의 궁극적인 성취는 야곱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

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질 것입니다(롬  1:3 눅  1:32).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구속사를 분명하게 성취시키실 것이라는 확증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이름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알리십니다. 셋째,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언약의 구조 속에서 후손 개념은 항상 가나안 땅 소유 약속과 연결되어집니다. 이는 영생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구약 계시의 구조 속에서 가나안 땅은 영적 내세에 대한 예표로서 그 궁극적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에서 완성을 볼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 약속을 재차 확인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을 떠나시게 되자, 야곱은 단을 쌓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앙하였음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을 즈음에 라헬이 베냐민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산모는 불행하게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16‐21절). 라헬은 아들을 낳으면서 그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란 뜻의  ‘베노니’라고 불렀는데, 야곱이 이를  ‘베냐민’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베냐민의 출생은 자연적인 출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하신 약속의 확실한 성취를 보장하시는 의미에서 아이의 생산을 의도적으로 주관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야곱의 나이는 이미  100세를 훨신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아이의 이름을 베냐민, 즉  ‘내 오른 손의 아들’이라고 바꾼 것입니다. 야곱은 이 아이의 출생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많은 후손을 내고 계심을 확신하였습니다. 지금 베냐민은 야곱의 열 두 번째 아들로 태

 

 

어났습니다.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한 사건 다음에(22절), 이내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이

름이 나오는 것은 주목할만합니다(22‐26절). 르우벤의 가증한 음행이 야곱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였습니다. 동서고금의 세계 역사를 통해 언제나 이 지저분한 음욕이 인간의 타락을 주도해 왔음을 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당시에는 이 사실을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야곱은 이후 애굽에 내려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들을 축복할 때에 이 사건을 언급하게 됩니다. 이후 야곱은 아비 이삭의 사망을 대하게 됩니다(27‐29절). 이삭이 사망할 당시의 나이가  180세였는데, 이는 이후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 후로도  12년이 지나서 되어진 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편의상 이삭의 사망 보도를 이곳에 배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나란히 이삭의 장래를 치룬 것으로 보아 두 형제의 사이는 과히 나쁜 상태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모세는 에서의 이야기를 꺼낸김에,  ‘에서의 톨레톳’을 기록하였는데(36:1‐43), 이는 창세기 전체를 통해서  10번 등장하는  ‘톨레톳 구조’의 한 분입니다.